(서울=연합뉴스) 홍규빈 안정훈 조현영 기자 = 서울 관악구의 상록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59명 가운데 24명의 성(姓)은 부씨다.
태어나자마자 베이비박스에 남겨져 부모의 생사조차 확인이 안 되다 보니 보육원 원장인 부청하(78) 씨의 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인 부모(9) 양은 어린이날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는 질문에 해맑게 웃으며 "매니큐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요즘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아동용 화장품 장난감이 유행이라고 한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이틀 앞둔 3일 보호 시설에 사는 많은 아이들이 어린이날을 마냥 행복하고 즐겁게만 맞이할 수는 없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동갑 자매 A(12)양과 B(12)양은 이혼 후 아버지 손에 자라면서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보육원에 들어왔다.
베트남으로 떠났던 어머니가 수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아이들을 데려가지는 못했다.
언니 A양은 장래 희망을 묻자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고 수줍게 말하며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 도와주는 게 더 좋으니까"라고 했다.
동생 B양은 "시설에 입소해서 맞는 첫 어린이날이라서 보육원 프로그램을 기대하고 있다"며 "특별히 기대하는 선물은 아직 없다"고 자못 어른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 원장은 "학대를 경험하고 철이 일찍 들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날 시설 벽면에는 아이들이 직접 그린 운동선수나 만화 캐릭터 그림들이 눈에 띄었는데 가족이 그려진 그림은 볼 수 없었다. 부 원장은 "학대를 받고 들어온 아이들이 많다 보니 가족들 그림은 잘 그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동갑 자매인 A(12)양과 B(12)양
[안정훈 촬영]
관악구 그룹홈 '샘물의집'에서 만난 방모(9) 군은 어린이날을 맞아 선물 받은 '경찰특공대' 레고를 갖고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혼모인 그의 어머니 C씨는 혼자 경제활동을 하면서 도저히 방군을 양육해낼 수가 없어 생후 24개월의 방군을 시설에 맡겼다.
작년에는 방군이 엄마를 너무 보고 싶어해 그룹홈 측이 잠적한 C씨를 수소문해 겨우 찾아냈고 7년 만의 모자 상봉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방군은 사진과 다른 엄마의 모습에 낯을 많이 가렸고 C씨는 1시간 반 가까이 눈물만 쏟아내다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그룹홈의 책장에는 방군이 어설프지만 정성스러운 글씨로 '행복한 우리가족'이라고 적은 종이가 한쪽에 놓여있었다.
방군은 "샘물의집 식구들과 내가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적었어요"라고 말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방모(9) 군
[조현영 촬영]
청소년이 돼도 어린이날의 씁쓸함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보육원 앞에 버려져 엄마를 본 적조차 없는 지적장애인 D(17)군은 서울의 한 그룹홈에서 같이 지내는 친구에게 "옛날에 엄마랑 에버랜드에 갔었다"고 거짓말을 하곤 한다.
한 친구가 가끔 아버지를 만나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면 그것이 부러운 듯 상상의 나래를 펼쳐 없는 얘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같은 그룹홈에 사는 E(17)군은 췌장암을 앓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을 원장에게 자주 한다. 가족이 생계를 이유로 더는 자신을 찾지 않고 그룹홈의 연락조차 피하는 상황은 알지 못한다.
그럴 때면 그룹홈 원장은 E군에게 "열심히 살아서 멋있는 어른이 되어 건강해진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 어떻겠니"라며 "건강하게 자라서 멋있는 청년이 돼서 찾아가면 엄마가 더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하얀 거짓말을 한다.
원장은 통화에서 "명절이나 어린이날은 시설 사는 아동들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시기"라며 "저희가 데리고 나가서 여행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하지만 뿌리에서 오는 공허함은 항상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어린이날 행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의 쓸쓸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민외순 샘물의집 대표는 "코로나 전에는 놀이동산에 가거나 외식도 하고 파티도 했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그러지 못해 아이들이 많이 아쉬워했다"며 "이번 주와 다음 주 주말엔 놀이동산과 한강에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청하 상록보육원장은 "2년간은 후원자들이 많이 오지 못했다"며 "그래도 올해에는 거리두기가 좀 풀려서 어린이날에 행사도 열고 후원금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rbqls1202@yna.co.kr
홍규빈(rbqls1202@yna.co.kr)
기사원문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3153174